4월의 함박눈이 무색하게 6월이 시작되자마자 따가운 햇빛이 공격을 해오고 있다. 최고 기온 30도를 오르내리며 매년 늘 하는 걱정, '올 여름 더위를 어떻게 보내지?'가 시작이다. 이럴 때 아침저녁 달라지는 날씨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아이템 하나는 정말이지 반갑기만 하다.

봄에는 재킷이나 트렌치 코트 안에서 이너로, 지금은 탱크 탑(tank top)이나 브라 탑(bra top) 위의 아우터로, 당연히 아이템 하나의 단독 착장만으로도 가장 시크한 여자가 되게 해주는 아이템...오늘은 바로 셔츠, 그 중에서도 화이트 셔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고대와 중세 시대의 겸손한 시작

화이트 셔츠의 기원은 고대 문명까지 올라간다. 고대와 중세에 걸쳐 이집트의 '칼라사리(kalasaris)'. 그리스의 '키톤(chiton)', 로마의 '튜니카 마니카타(tunica manicata)'로 불리던 화이트 셔츠의 전신은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입었으며, 오늘날 같은 주목할 만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 당시 셔츠는 대중에게 보이도록 의도되지 않은 매우 개인적인 의복, 주로 속옷이나 잠옷으로 사용되었으며, 칼라(collar)나 단추가 없는 대마, 리넨 또는 면으로 만든 흰색 튜닉(tunic) 형태를 띠었다. 단추 구멍은 중세 말에서야 상반신 부분에 나타났고, 남성과 여성 모두 날씨와 겉옷의 거칠기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입었다. 19세기까지 염색한 옷을 피부에 직접 닿게 입는 것은 권장되지 않았다. 따라서 셔츠에 흰색을 선택한 것은 그 시대의 특징인 위생 및 순도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에 우연이 아니었다. 이러한 초기 셔츠는 비록 디자인이 초보적이긴 했지만, 세련미의 특징인 화이트 셔츠로 진화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출처>주로 속옷이나 잠옷으로 활용되던 셔츠의 전신, The Life of John Hunter

화이트 셔츠가 두드러지게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the Renaissance, 대략 1350년~1600년) 시대였다. 16세기 초, 남성들은 화이트 셔츠를 착용자의 사회적 지위와 풍요를 반영하는 화려한 러플(ruffs), 프릴(frills)과 같은 디테일로 장식하기 시작했고, 유럽 궁정에서는 실크, 레이스, 퍼프(puff) 소매까지 이 아이템을 더욱 귀족적인 것으로 끌어올려 화이트 셔츠를 엘리트 계층의 상징으로 만들어 버렸다. 화이트 셔츠는 부와 번영의 부인할 수 없는 표식이 되었고, 가장 부유한 사람만이 흠잡을 떼 없는 셔츠를 과시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의 최고 발명품인 탈부착식 칼라는 부유한 사람들이 셔츠 자체를 즉시 세탁할 수 없을 때 셔츠 칼라만을 바꿔 입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이로써 대중 앞에서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이 관행은 상류 계층에서 시작되어 더 넓은 부르주아(bourgeoisie) 계층의 모방을 통해 널리 퍼졌다. 이러한 전통에서 '화이트 칼라(white-collar)'라는 표현이 유래되었는데, 산업 시대의 사무직 근로자를 지칭하는 말로, 작업복을 입은 육체 노동 근로자 '블루 칼라'와 대조된다. 이렇게 20세기 초에 등장한 용어는 화이트 셔츠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서구 세계의 집중적인 산업화, 관료화와 얼마나 동시대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출처>르네상스 시대의 러플 칼라들, pinterest.com

19세까지 셔츠는 주로 여전히 남성과 여성의 속옷이었지만, 면의 섬세함과 드레스와 정장 아래에서 보이는 레이스 장식이 더해지면서 화이트 셔츠의 용도는 더욱 귀중해졌다.

르네상스의 호사스러움을 대체한 것은 산업 혁명의 실용주의였다. 사치스러운 장식은 선과 단순화에 자리를 내주었고, 19세기는 화이트 셔츠의 정점을 나타내며, 영국 신사 클럽에서 인정받는 공식성과 우아함, 세련미의 상징이 되었다. 이 전환은 테일러드 수트와 정장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20세기 초반에는 혁신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과거의 지나치게 화려한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윈저 공작(the Duke of Windsor)과 캐리 그랜트(Cary Grant)와 같이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보다 느긋한 옷차림으로 대중화시켰고, 이는 부드럽고 덜 구조적인 화이트 셔츠의 진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우아함을 잃어버리지 않고도 편안함과 실용성을 원하는 욕구를 반영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남성 관점에서도 20세기 중반 할리우드(Hollywood)는 알랭 들롱(Alain Delon)과 폴 뉴먼(Paul Newman) 같은 스크린의 전설들이 무심함과 카리스마로 화이트 셔츠를 입으면서 반항적인 이미지도 옷에 부여해주었다. 유명인과 함께 하는 레드 카펫의 시대가 왔고, 블랙 타이와 함께 화이트 드레스 셔츠가 온 것이다.

여성 패션에 있어서 화이트 셔츠는?

14세기에 시작된 남성의 본격적인 셔츠 차용에 비해 여성은 코르셋, 크리놀린 및 기타 여성적 특성을 강조하고 남편의 경제적, 사회적 권력을 반영하는 기타 장신구의 제약에 따라야 했다. 여성 패션에서 화이트 셔츠가 주목을 받게 된 첫 순간은 18세기, 1783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가 초상화를 위해 허리에 화려한 실크 띠를 두르고 최소한의 주름 장식이 있는 흰색 면 '슈미즈 아 라 레인(chemise à la reine)'을 입었을 때이다. 마담 비제-르브룅(Madame Vigée-Lebrun)이 그린 초상화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시 초상화들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여유로움을 품었고, 그 당시 상류 사회의 상징이었던 실크가 아닌 저렴하고 모든 사람이 입는 면 소재의, 속옷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던, 흰 슈미즈 드레스(chemise dress)에 최소한의 보석을 착용한 모습은 사실상 큰 소동을 일으킬 만 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슈미즈 아 라레인'은 속옷을 겉옷으로 바꿔 사생활과 공적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요한 의류가 되었다.

<출처> 초상화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Wikipedia.

상류 사회에서 이 그림은 예측 가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대중의 항의, 처음에 받은 충격이 가라앉자 곧 면 의류가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는 섬유 산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면화 사업과 바람직하지 않은 노예 제도의 전례 없는 성장을 초래했다. 캐롤라인 런던(Caroline London)의 설명에 의하면 "기술과 노예 노동은 면화를 저렴하게 만들었고, 저렴해진 가격은 수요를 더욱 높아지게 했으며, 그로 인해 대량 생산이 증가해 가격은 더욱 떨어졌습니다.“ 당시 왕족들은 지금의 셀럽과 유사했기에 그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고, 그녀가 그 때 흰색 면 슈미즈 드레스를 입기로 한 선택은 의도치 않게 오늘날 우리의 옷장에서 화이트 셔츠가 필수적인 아이템이 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마리 앙투와네트가 그 다음 세기 내내 면 산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초상화 사건 이후 비난 받았던, 우리가 알고 있는 화이트 셔츠는 20세기까지 남성만 입었고, 수십 년 동안 깨끗한 흰색을 유지할, 즉 셔츠가 더러워지는 육체 노동을 하지 않고 자주 옷을 세탁할 여유가 있는 부유한 신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 남성과 여성의 복장이 더욱 유사해지고 여성의 취업이 일반화되면서 셔츠는 스커트 수트와 함께 입는 유럽 여성의 옷장 필수품이 되었다.

직업 활동을 통한 해방은 1920년대에 이르러 코코 샤넬을 포함한 디자이너, 배우 및 유명인들이 셔츠의 사회적, 성별 및 패션적 의미의 경계를 깨는 과정으로 이어졌고, 그들은 마침내 성별과 계층의 경계를 허물었다. 전설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수세기 동안의 엄격한 옷 구분 규칙, 남성과 여성의 규칙을 바꾼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여성용 바지를 유행시키고, 코르셋을 남성용 셔츠로 바꾸었다. 이는 화이트 셔츠를 여성 패션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여성이 100년 전만 해도 살 수 없었던 아이템을 얻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또한, 20세기에 영화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화이트 셔츠는 194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는 루이스 브룩스(Louise Brooks),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같은 영향력 있는 여성들 덕분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의상 중 하나인 결정적인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오드리 헵번의 롤업 소매 흰색 셔츠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영화 장면은 화이트 셔츠를 각인시켜 주었다.

<출처>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pinterest.com, blog.naver.com

그 후 화려한 사이키델릭, 히피, 디스코 패션의 세월이 지난 후, 화이트 셔츠는 1970년대 중반에 패티 스미스(Patti Smith)의 데뷔 앨범 'Horses'의 표지로 돌아와 패션의 영역에서 유니섹스 요소로서의 화이트 셔츠의 시작을 알린다. 또한, 프랑스 기성복 디자이너 아그네스 비(Agnes b)는 1975년 첫 매장에서 저지 카디건과 스트라이프 셔츠와 함께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새로운 데일리 웨어의 상징으로 구상된 심플한 화이트 셔츠를 선보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옥스포드 셔츠(Oxford shirt)가 필수적인 특징인 '프레피 룩(preppy look)’로도 돌아왔다.

<출처> 패티 스미스(Patti Smith)의 데뷔 앨범 'Horses'의 표지,

Melon.com

한편,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로 유명한 랄프 로렌은 그의 컬렉션에 화이트 셔츠를 꾸준히 선보이며, 클래식 세련됨의 상징으로 만들었고, 그의 접근 방식은 화이트 셔츠의 다양성과 적응성을 찬양하며, 그것을 캐주얼과 정장 모두에서 필수 아이템이 되게 만들었다.

이처럼 화이트 셔츠는 처음에는 남성복의 특징이었지만, 여성복으로 스며들어 여성들의 평범한 겉옷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현대 여성들의 새로운 여성성의 상징이 되었고, 그 후로 더욱 남녀 공통적(androgynous)인 길을 걸어갔다.

화이트 셔츠가 이처럼 확고한 필수 아이템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Browns의 여성복 구매 책임자인 그램스턴(Heather Gramston)은 "클래식한 화이트 셔츠는 다양한 스타일로 연출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질리지 않을 것입니다. 턱시도, 청바지, 스커트, 반바지와 잘 어울리며 집에서 느긋한 하루를 보낼 때 오버사이즈 화이트 셔츠를 단독으로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영국의 셔츠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인 엠마 윌리스(Emma Willis)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양질의 면이나 리넨으로 만든 잘 자른 흰색 셔츠는 비즈니스, 스마트 캐주얼 또는 캐주얼 등 모든 것과 함께 매우 깔끔하고 상큼해 보입니다. 청바지, 정장 또는 이브닝 룩과 함께 입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화이트 셔츠는 직장에서 주말까지, 낮에서 밤까지 모든 영역을 당당하게 넘나들며 입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이기에 여전히 인기가 있다고 윌리스는 덧붙인다.

여기에 패션 스타일리스트 틸리 휘팅(Tilly Wheating)은 아래처럼 말하며 마침표를 찍는다. "저에게 흰색 셔츠는 다재다능하기 때문에 모든 옷장에 꼭 필요한 아이템입니다. 누구에게나 어울리고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뻣뻣한 면, 리넨, 실크, 퍼프 슬리브, 과장된 칼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입을 수 있습니다. 하이웨이스트 바지나 스커트와 함께 입거나, 캐주얼한 청바지에 프렌치 턱(French tuck)을 하거나, 심지어 드레스 아래에 겹쳐 입어도 멋지게 입을 수 있습니다.“

즉, 화이트 셔츠는 클래식과 컨템퍼러리, 고전과 현대 사이의 격차를 손쉽게 메워주는 흔치 않은 아이템인 것이다.

이렇게 지배적이고 매력적인 다재 다능함을 뽐낼 화이트 셔츠를 구매할 생각이라면 그램스턴은 모든 것이 핏과 소재에 달려 있다며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저는 오버사이즈를 선택하고 Jil Sander와 같은 브랜드에서 영원히 입을 수 있는 고품질 코튼을 선택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레이 카와쿠보(Rei Kawakubo)는 "한 가지 옷을 발명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발명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저는 치마와 바지와 함께 어울리는 화이트 셔츠를 발명하고 싶었습니다."(WWD, 2012년 11월 19일)라고 답한다.

자, 이제 우리 이렇게 찬사가 가득한 아이템, 화이트 셔츠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출처> singles, pinterest.com, blog.naver.com, vogue. co.kr


글 ㅣ 김은영

<필자 소개>

연세대 의생활학과 졸업하고 이랜드 여성캐쥬얼 브랜드 더데이,2Me 실장을 거쳐 로엠 실장 시 리노베이션을 진행하였다. 2008년부터 이랜드 패션연구소에서 여성복 트렌드 분석과 브랜드 컨셉을 담당하였으며, 여성복 SDO를 역임하였다.
현재 트렌드 분석과 메가 스트림 현상, 복식 이야기를 연구,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