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백을 든 사람을 마주칠 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세련됨, 우아함,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가치. 하지만 환경보호나 지속가능성을 연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다. 명품은 아름답고 비싼 대상일 뿐, 환경 문제는 굴뚝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나 대량생산 라인을 돌리는 기업들이 고민해야 할 몫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패션 업계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샤넬을 비롯한 명품 하우스들이 지속가능경영의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업 이미지를 다듬기 위한 홍보성 캠페인 차원이 아니다. 원자재를 확보하는 방식부터 제품을 제조하고 전 세계로 운송하는 전 과정, 심지어 고객이 제품을 사용한 뒤 폐기하는 마지막 단계까지 비즈니스 시스템 자체를 재설계하고 있다.
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재활용 소재를 일부 사용하거나 종이 쇼핑백으로 바꾸는 수준에서 친환경을 표방한다. 물론 의미 있는 출발점이긴 하지만, 전체 사업 구조에서 보면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샤넬이 보여주는 접근 방식은 차원이 다르다. 부분적 개선이 아니라 전체 비즈니스 모델의 근본적 전환을 추구한다. 명품 브랜드가 산업을 선도하는 방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패션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그 규모는 국제 항공과 해운을 합친 것보다 크다. 패스트 패션이 주범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쉽지만, 명품 브랜드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생산 방식, 여러 대륙을 가로지르는 복잡한 공급망, 그리고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해 팔리지 않은 제품을 폐기해온 관행까지. 화려한 런웨이 뒤편에는 환경 부담이 숨어 있었다.
유럽연합이 패션 기업들을 향해 규제의 고삐를 죄고 있다. 판매하지 못한 제품의 폐기를 금지하고, 환경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법안이 준비 중이다. 환경 문제가 선택적 사회공헌 활동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경영 과제로 바뀌었다. 규제만이 아니다. 소비자들, 특히 젊은 세대는 브랜드가 환경에 어떤 책임을 지는지 꼼꼼히 살피고 구매 결정을 내린다. 변화의 파도 앞에서 명품 브랜드들은 갈림길에 섰다. 최소한의 규제 요구사항만 충족할지, 아니면 산업 전체의 기준을 새롭게 쓸지. 샤넬은 후자를 택했다.
표면이 아닌 뿌리부터, 샤넬이 선택한 전방위 전환
샤넬의 접근법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패션 브랜드들과 확연히 다른 지점들이 포착된다. 대부분의 브랜드가 재활용 폴리에스터 사용이나 종이 쇼핑백 전환 같은 부분적 변화를 성과로 내세운다. 샤넬이 던진 질문은 훨씬 근본적이다. 사업 전체를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브랜드가 백 년 넘게 추구해온 핵심 가치 '영원함'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부터 시작됐다. 샤넬 제품이 세월이 흘러도 가치를 잃지 않듯이, 브랜드가 만들어내는 환경적 영향 또한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실천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과학기반목표이니셔티브(SBTi)라는 국제 기구로부터 검증받은 계획을 수립했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추상적 슬로건 대신, 언제까지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일지 구체적 수치로 제시하고 제삼자의 검증을 받았다.
흥미로운 대목은 명품 패션브랜드가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샤넬은 몽골의 캐시미어 목축업자들과 직접 손잡고 풀밭을 돌보는 새로운 방법을 함께 개발한다. 과도한 방목으로 황폐해진 초원을 회복시키는 프로젝트다. 가죽 생산자들과는 동물 복지를 개선하면서도 환경 부담을 줄이는 목장 관리법을 연구한다. 단순히 원자재를 구매하는 거래 관계를 넘어선 모습이다. 장기적 파트너십을 통해 산업 생태계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만이 아니라 제품 수명 전체를 재설계하는 시도가 펼쳐진다. 올 해 샤넬이 만든 '네볼드(Nevold)'라는 플랫폼이 대표적이다. '절대 낡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처럼, 자투리 원단과 미사용 직물, 심지어 오래된 제품까지 모아서 새로운 고품질 소재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재활용은 대개 품질이 낮아지는 '다운사이클링'으로 귀결되기 쉽지만, 네볼드가 추구하는 방향은 명품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면서 소재를 순환시키는 것이다.
중국에서 열린 뷰티 행사에서 샤넬은 무대 세트와 장식물을 열다섯 차례가 넘는 행사에서 반복 사용했다. 같은 재료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해 사용하면서 행사 관련 탄소 배출을 대폭 줄였다. 명품의 화려함이 반드시 새것과 낭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이뿐 아니라 고객을 위한 수선 서비스 '샤넬 앤 모아(Chanel & moi)'도 주목할 만하다. 핸드백, 의류, 신발, 주얼리까지 수선하고 복원해준다. 새 제품 구매를 부추기는 대신, 오래된 제품을 소중히 간직하도록 돕는다.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재고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브랜드의 전략적 운영 측면에서도 전환이 진행됐다. RE100 이니셔티브의 일원으로서 2025년까지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2024년 말 기준으로 전체 운영의 99%가 재생에너지로 전환됐다. 33개 매장에는 태양광이나 지열 시스템을 직접 설치했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재생에너지 구매 계약을 체결하거나 인증받은 재생에너지 크레딧을 활용하는 방식을 적용하는등 적극적으로 에너지 전략을 펼치고 있다.
물류 방식에서도 변화가 감지 되는데, 항공 운송을 대폭 줄이고 배와 기차 운송 비중을 늘렸다. 특히 향수와 화장품 부문에서 운송 방식을 전환하면서 물류 관련 탄소 배출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환경 부담을 덜어내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영 조직 차원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샤넬은 경영진의 성과 보너스 일부를 환경 목표 달성과 연결시켰다. 말로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평가와 보상 체계에 실제로 반영한 것이다. 직원들의 역량강화를 위해 샤넬 지속가능성 아카데미를 만들어 전 직원이 기후변화, 순환경제, 혁신에 대해 배우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협력해 임원급을 위한 특별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더 친환경적인 소재를 고민하고, 물류팀이 운송 경로를 최적화하며, 마케팅팀이 순환 가능한 행사를 기획하는 모든 과정이 교육과 문화 변화에서 비롯된다. 지속가능성은 환경팀만의 업무가 아니라 모든 직원의 일상적 의사결정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원칙을 이행하고 있다.
명품의 재정의가 던지는 질문, 그리고 우리의 선택
샤넬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한 브랜드의 성공담이 아니라 산업 전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샤넬 같은 업계 선도 기업이 움직이면 다른 브랜드들도 따라온다. 경쟁업체들은 샤넬의 행보를 주시하고, 협력업체들은 샤넬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변화한다. 한 브랜드의 결단이 산업 전체의 표준을 바꾸는 메커니즘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배경에는 단순히 법규 준수나 이미지 개선 이상의 통찰이 자리한다. 사업 모델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려면 지구 환경도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최고급 캐시미어를 확보하려면 몽골의 초원이 건강해야 하고, 프랑스 향수를 만들려면 그라스의 꽃밭이 번성해야 한다. 환경보호가 사업과 별개의 사회공헌 활동이 아니라 사업 기반 자체라는 인식이다. 명품 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 자원에 의존하거나, 고객 신뢰에 기반하거나, 장기적 시각이 필요한 어떤 산업이든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샤넬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짚어보자. 첫째,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시각이다. 재활용 소재 하나 도입하는 것도 좋지만, 사업 모델 전체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공급망 전체를 파트너로 만드는 접근이다. 혼자 잘하는 게 아니라 협력업체와 함께 변화할 때 진정한 전환이 가능하다. 셋째, 조직 문화와 인센티브를 정렬시키는 구조다. 환경팀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모든 직원이 일상적으로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샤넬이 추구하는 방향의 핵심은 결국 명품의 재정의다. 명품이란 단순히 비싸고 희소한 대상이 아니다. 진정한 명품은 시간을 견디고, 세대를 넘어 가치를 유지하며, 만드는 과정에서도 세상에 아름다움을 남기는 존재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이, 자연도 한 걸음씩 회복시키고 지켜나가는 과정이 진정한 럭셔리라는 철학이다.
명품 산업을 넘어 모든 비즈니스에 적용 가능한 철학이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든, 컨설팅 회사를 이끌든, 제조업체를 경영하든,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 비즈니스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가. 우리가 사용하는 자원이 미래에도 계속 이용 가능한가. 우리의 성공이 다른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건 아닌가. 샤넬 사례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쉽지 않다. 투자가 필요하고, 기존 방식을 바꿔야 하며, 단기적으로는 비용이 더 들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강한 브랜드, 더 충성도 높은 고객, 더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한다.
환경 문제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제조업이나 중공업을 떠올린다. 패션, 특히 명품은 그런 문제와 거리가 멀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샤넬 사례는 선입견을 깬다. 오히려 명품 브랜드야말로 장기적 시각과 품질에 대한 집착, 그리고 브랜드 유산을 지키려는 의지 때문에 지속가능성에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브랜드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선택이 결국 어떤 미래를 만드는지 말이다. 명품을 소비한다는 행위가 더 이상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책임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정으로 세련된 소비가 아닐까. 사업가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샤넬의 접근 방식은 규모나 산업을 막론하고 적용 가능한 원칙들을 담고 있다. 전체를 보는 시각, 파트너와 함께하는 여정, 문화와 인센티브의 정렬, 투명성과 검증. 원칙들을 각자 사업에 맞게 적용한다면, 지속가능성은 부담이 아니라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명품의 본질이 영원함이라면, 이제 그 영원함은 제품만이 아니라 지구까지 포함해야 한다. 샤넬이 걷기 시작한 길이 패션 산업 전체의 미래가 되기를, 그리고 모든 산업이 각자의 방식으로 길을 따라가기를 기대한다. 진정한 럭셔리는 아름다움과 책임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저자소개]
심준규. 경영학박사.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 ESG로 성과내는 사람들>,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